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응우옌 왕조 (문단 편집) === 프랑스의 침략 === 베트남은 1800년대 중후반에 걸쳐서 끊임없는 서구 열강들의 간섭에 시달렸다. 특히 프랑스의 간섭이 개중에서 가장 심했다. 해당 시기의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면서 그 동안의 정국 혼란에서 어느정도 벗어났을 시점이었고 또한 나폴레옹 3세는 그동안 프랑스 확장의 걸림돌이던 영국과 아예 친하게 지내는 쪽으로 노선을 틀어 뒷탈의 여지를 없앤 뒤 안정적으로 해외 식민지 확보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와중에 위와 같은 만행이 프랑스 정부와 가톨릭 교단에 생생히 전해져 전 프랑스 내에 베트남을 규탄하는 여론이 휩싸였고, 이는 본격적인 베트남 침략의 빌미가 되었다. 1858년 9월에는 [[스페인]] 함대가 베트남 관리들이 스페인 선교사들을 체포한 것을 빌미로 [[다낭]]에 쳐들어와 분탕질을 일삼았고, 2달 후에는 사이공과 메콩 강 일대를 휩쓸었다. 3년 후인 1861년에는 70척에 달하는 프랑스 함대가 스페인과 연합을 맺고 베트남 남부 지방으로 진군해 들어왔으며, 스페인과 프랑스라는 두 강대국을 상대할 여력이 없던 뜨득 황제는 어쩔 수 없이 강화를 맺을 수 밖에 없었다. 황제는 [[판타인잔]](Phan Thanh Giản, 潘淸簡, 반청간) 등을 사이공에 파견해 프랑스, [[스페인]] 연합군과 베트남 사이에 제1차 사이공 조약(1862년 6월 5일)을 맺으며 항복했다. 1차 사이공 조약에 따라 [[다낭]] 등 세 항구가 개항되었고, [[꼰선]](Côn Sơn, 崑山) 섬이 포함된 꼰다오(Côn Đảo, 崑島, 곤도) 제도[* 프랑스는 말레이어 발음을 따서 풀로콩도르(Poulo-Condore)라고 불렀다. 프랑스가 꼰선 섬에 지은 감옥에 베트남의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수감되었다.]와 코친차이나의 동부 3성(省)[* 비엔호아, 자딘, 딘뜨엉.]이 프랑스에 할양되었으며, 프랑스인에게 전국에서 그리스도교 포교의 자유와 메콩 강의 항행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약이 비준된 뒤 응우옌 왕조의 황제는 3성의 반환을 요청하기 위한 특사를 파리에 파견하였고, 프랑스 외무당국도 한때 조약의 재검토를 시작하였으나(1864년 반환조약), 비준하지 않고 오히려 사이공 현지의 프랑스군이 코친차이나의 서부 3성[* 빈롱, 안장, 하띠엔.]마저 점령함으로써(1867년) 남부의 6성은 사실상 프랑스령 코친차이나가 되었다. 이때 서부3성의 현령이자 제후였던 판타인잔은 프랑스군과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수세에 몰리자 결국 음독자살한다. 이로써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기 시작한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약화시키기 위해 베트남에게서 란쌍 6부 땅을 뜯어서 라오스에 되돌려 주었고, 역시 프랑스의 보호령이 된 캄보디아에게 베트남이 뜯어간 시아누크빌, 캄포트, 케프, 스바이리엥을 돌려주었다. 1862년 이래로 프랑스가 장악한 베트남 남부 지역을 [[코친차이나]]라고 부른다. 코친차이나 지역을 장악한 프랑스는 당연히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더욱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고 싶어했고, 애초에 프랑스가 코친차이나를 정복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메콩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중국의 [[윈난 성]]으로 통하는 무역로를 개척하려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2년 동안 메콩 강을 탐험한 에르네스트 두다르 드 라그레(Ernest Doudart de Lagrée, 1823 ~ 1868)는 메콩 강 상류가 급류가 심하고 암초가 많아 무역로로 적당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와중에 1871년 프랑스의 모험가이자 상인인 장 뒤퓌(Jean Dupuis, 1828 ~ 1912)가 베트남 북부를 흐르는 홍강을 통해 윈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1872년 11월 베트남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윈난으로 화물을 운반했으나, 베트남 정부는 뒤퓌를 도운 베트남인들을 투옥하고 뒤퓌의 영업활동을 금지했다. 뒤퓌로부터 보호 요청을 받은 코친차이나 총독 마리쥘 뒤프레(Marie-Jules Dupré, 1813 ~ 1881)는 군대를 파병하여 홍강 유역의 [[하노이]]를 점령하였고, 베트남은 프랑스와 제2차 사이공 조약(뒤프레 조약)을 맺는다. 프랑스는 이 조약에서 베트남의 주권과 독립을 인정하는 대신, 코친차이나 6성의 완전한 식민지배와 함께 하이퐁, 하노이 등의 항구와 홍강(송코이강)을 통상 목적으로 개방하게 하였다. 또 하노이에 [[영사관]]을 개설하고 수도 후에에는 공사관을 주재시킬 권리를 얻었다. 또한 하노이에 있는 베트남 군대를 대폭 해산시켜 기본적인 치안만 유지하는 수준으로 전락시켜 버렸고, 하노이를 포함한 상당수의 항구들에 프랑스 군대를 합법적으로 주둔시킬 권리를 뜯어내면서 베트남의 식민지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